유일한의 생애

유일한의 생애

유일한의 생애

독립운동가 유일한

유일한은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선친의 애국심과 한말의 나라 없는 국민의 설움, 그리고 성장기에 몸에 익힌 기독교적 저항정신을 통하여 애국사상을 배웠고, 한인 소년병학교에서의 군사 훈련과 서재필로부터의 영향 등에 의하여 민족주의 정신을 확립하였다.

1919년 3․1 운동의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유일한 박사는 서재필이 주도하는 필라델피아‘한인자유대회’에 참가하여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釋明)하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조국의 국권 회복과 독립을 위한 행보를 넓히기 시작한 유일한 박사는 1941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 집행부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1942년에는 미 육군 전략처(OSS)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에서는 아시아 관계 전문가가 필요하게 되었고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갈망하고 있던 유일한 박사는 그 고문직을 맡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해 8월 미국 로스엔젤레스 시청에서 태극기를 게양하는 현기식에서 축사를 낭독하였으며, 재미 한인들로 구성된 맹호군 창설의 주역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8․15 해방을 수 개월 앞둔 1945년 유일한 박사는 미 육군 전략처(OSS)에서 시도한 냅코작전(NAPKO Project)에 참여하여 제1조 조장으로 활약하였다. 냅코작전(NAPKO Project)이란 민족의식이 투철한 재미 한인을 선발하여 특수공작 훈련을 시킨 후 한국 내에 침투시키려는 특수공작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고 말았다.

냅코작전과 국내 정진 냅코계획(NAPKO Project)

이전에도 미국은 한국민을 무장시켜 국내에 침투시킬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아마도 유명한 중경임시정부의 직할무장군대인 광복군의 OSS 훈련과 국내 정진 계획이었을 것이다. 3월 7일 Field Experiment Unit의 총 책임을 진 Fifler 대령, 도노반 OSS 국장에게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이 냅코프로젝트의 목적은 ‘한국 내에 당장 침투할 수 있게 준비하고 궁극적으로 일본에 침투하여 첩보 지하조직 조성 등의 활동을 하고 사보타지와 무저항 운동으로 이어갈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활동으로 2,300만 한국 국민이 적극적으로 광복을 위한 혁명을 지지한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미국 본토의 OSS 당국에서는 물밑으로 한국에 침투하는 냅코작전을 추진했고, 중국의 OSS 지부는 광복군을 이용한 독수리작전을 추진하는 한편, 연안의 조선의용대를 이용하여 만주로 우회하는 북중국작전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일제의 패망으로 두 개의 한반도 침투작전은 좌절되었다.

전쟁이 그렇게 일찍 끝나지 않았으면 유일한 박사의 조직망과 서울의 유한무역회사의 조직망을 통한 지하조직이 생겼을 것이다. 곧 뒤따라올 광복군의 작전으로 벌집을 쑤셔놓은 듯이 한반도도 프랑스의 지하저항운동과 비슷한 감격적인 광경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기업인 유일한

기업의 기능이 단순히 돈을 버는 데서만 머문다면 수전노(守錢奴)와 다를 바가 없다.

유일한 박사는 애국⋅애족의 정신을 기업경영의 기본 이념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윤 추구를 도외시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긍정적으로 여겨 적극적으로 이윤을 추구하였다. 그는 기업 이윤을 우량제품의 제조, 판매에 의한 공헌의 대가로 이해했고, 우량제품은 국민에게 공헌하는 물품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기업은 이윤 추구에 의해 성장, 발전하고 이를 통해 고용이 증대되며 나아가 국민 경제의 발전에 기여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국가와 민족에게 공헌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신념 아래 유한양행을 제약업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건강한 국민만이 잃었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

라초이 식품회사의 성공으로 설립 이후 약 4년 만에 50여만 불에 이르는 이익금을 남긴 유일한 박사는 원료 확보를 위해 조국에 일시 귀국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보았다. 그리하여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 자기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1926년 12월 10일 제약회사인 유한양행을 설립하였다. 자본이 축척됨에 따라 1936년 유한양행은 총불입 자본금이 75만 원인 법인체 주식회사로 발족하여 유일한 박사가 제1대 취체역 사장에 취임하였다. 1936년까지 유한양행의 전 재산은 유일한 박사의 개인 재산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업이 확실한 기반 위에 서자 회사의 소유권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줄 계획을 수립하고 법인체인 주식회사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는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며 사원의 것이라는 뜻에서 주식의 일부를 사원들에게 공로주로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행된 ‘사원지주제’이다. 1962년 유한양행은 제약업계 최초로 주식을 공개하여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였다.

유일한 박사가 주식을 공개한 직접적인 목적은 자기자본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주식의 대중적인 소유는 회계의 공개와 함께 기업의 민주화를 의미한다는 차원에서 상장한 것이었다. 또한 애국정신과 직결되는 창립자의 납세관에 따라 유한양행은 ‘정직하고 조속한 납세’를 지상 시책으로 삼고 실천하여 ‘한국 유일의 자진납세업체’, ‘한국 유일의 장부공개업체’ 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 하나 특기할만한 것은 1969년 10월 30일에 개최된 제44기 정기주주총회에서 애국자이며 기업가인 유일한 박사는 그의 생애에 마지막이 되었던 사장직을 조권순 전무에게 계승시켰다. 그는 사장이 사임하면 그 아들이 사장직을 계승하는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폐단을 없애고 경영 인생을 마무리 한 것이다.

교육가 유일한

교육을 받은 사람은 능력이 개발되어 사회에 기여할 수 있으나, 교육을 받지 못하면 잠재한 능력은 빛을 보지 못하고 시들어 버린다.

교육 장학사업 측면에서도 유일한 박사는 기업 경영 못지않게 인재 양성을 중히 여겨왔다. 그 중에서도 그는 우리나라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기술인력 양성을 위한 전문기관의 필요성을 실감하였다. 그러던 중 1957년 사재로 소사에 고려공과학원을 설립하고 전체 학생에게 학비와 숙식비를 무료로 제공하면서 기술인력 양성에 전념하였다.

1961년 학교 이름을 한국직업학원으로 고치고 1964년 3월에는 다시 한국고등기술학교로 바꾼 후 같은 해 12월에 영등포구 항동에 교사를 신축하고 유한공업고등학교로 새로이 발족하였다. 이 학교는 기계과, 전기과, 건축과, 자동차과 등을 설치하고 학생 전원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여 훌륭한 기술인력을 육성시켜 배출하고, 1967년부터는 유한중학교를 병설 운영하였다.

어느 정도를 아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아는 것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유일한 박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일환으로 교육사업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교육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기인 휴전 직후에는 학비 면제와 무료 의식주 공급으로 빈민소년을 기능공으로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였지만, 경제가 성장하여 생활수준이 향상된 단계에서는 정규 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자신의 교육이념을 실현시킬 수 있는 유능한 인재와 기능공을 양산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공업고등학교 설립에 정력을 쏟았던 것이다.

전체 학생이 장학금으로 공부한 유한공고는 기업 이익의 사회환원 정신하에 설립 운영되어 왔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유한전문대학도 설립되었다. 또한 유능한 인재를 기르기 위하여 재단법인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금>(유한재단의 전신) 등 공익재단을 설치하여 교육 및 장학사업의 지원도 하였다.

유일한 박사의 숭고한 교육이념은 고려공과학원의 경영에서 잘 나타나있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보아 오랫동안 양반들이 지배하는 사회였고, 그들은 육체노동을 금기시하여 만약 양반이 기능공이 된다면 통혼을 하지 않을 정도로 천하게 생각하였다. 유일한 박사가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악습의 시정이었다. 그래서 빈민자제의 무상기술교육을 착안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뛰어난 자질을 가진 민족이므로 기술교육을 시킨다면 장차 그들은 유능한 기능공이 되어 자립할 것이고 국민경제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 여겨 이 분야의 투자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그가 늘 주장하였던 바와 같이 기업의 기능에는 유능하고 유익한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까지도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철학의 연장선상에서 기술교육을 일관하여 추진하였던 것이다.

사회사업가 유일한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은 유한공고의 학교 재단으로 <유한재단>의 전신이다. 후에 이 기금은 <유한학원>과 분리되었다. 유일한 박사는 생전에 이 재단에 이미 96,282주의 주식을 기증했다. 이로써 이 재단은 총 237,223주의 주식을 소유하게 됨으로써 총 주식 96만 주 가운데 24%를 소유한 사실상 유한양행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이 밖에도 유일한 박사는 생전에 연세대학교 재단에 주식 41,000주를 기증했으며 유한공고에 40,000주, 유한양행 사우공제회에 27,218주, 보건장학회에 17,368주를 기증했다. 이들 공익기관이 소유한 주식 비율은 45%에 달해 유한양행의 소유형태와 경영체제를 말해주기도 한다. 유일한 박사는 특히 연세대학교 재단을 비롯해 각 교육재단에 주식을 기증하며 단서를 붙였다. 즉 의료복지와 교육을 위한 목적 이외에는 주식을 매매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유일한 박사는 자신의 뜻이 사후에도 왜곡되지 않도록 해놓았다. 그는 단순히 재산을 사회에 돌려준 게 아니라 기업을 사회에 내놓았으며 그 기업은 지속적으로 사회를 위해 봉사하지 않으면 존재가치가 없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혈족에게 기업을 물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유일한 박사의 이런 정신은 그의 유언장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주식 기증 기관 주식 수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 96,282
연세대학교 41,000
유한공고 40,000
유한양행 사우공제회 27,218
보건장학회 17,368

<유일한의 주식 기증 현황>

  • 1. 손녀 유일링에게 대학까지의 학자금으로 1만 달러를 준다.
  • 2. 딸 재라에게는 유한공고 안에 있는 묘소와 주변 땅 5천 평을 물려준다.
  • 3. 자신 소유 유한양행의 주식 14만 941주는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에 기증한다.

유일한의 유언장 내용

재산처리에 관한 내용은 이것이 전부였다. 한때 유한양행 부사장까지 지냈던 아들 유일선에게는 아무 것도 남겨주지 않았다. 대학까지 가르쳤으니 혼자 살아가라는 말만 있었다. 또 부인에 관해서는 딸 재라에게 노후 복리를 위해 도와주라고만 했을 뿐 재산을 물려준다는 말은 없었다. 딸 재라에게 땅을 물려준 것도 사실은 상속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부탁이었다. 그 땅을 유한동산으로 가꾸어 줄 것과 주변에 울타리를 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그는 유한공고 교정에 묻혀 지하에서나마 마음껏 뛰어 노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한 것이었다.
아무리 큰 부(富)를 축척했다 할지라도 죽음이 임박한, 하얀 시트에 누운 자의 손에는 한 푼의 돈도 쥐어져 있지 아니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