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 유일한
기업인 유일한
기업의 기능이 단순히 돈을 버는 데서만 머문다면 수전노(守錢奴)와 다를 바가 없다.
유일한 박사는 애국⋅애족의 정신을 기업경영의 기본 이념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윤 추구를 도외시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긍정적으로 여겨 적극적으로 이윤을 추구하였다. 그는 기업 이윤을 우량제품의 제조, 판매에 의한 공헌의 대가로 이해했고, 우량제품은 국민에게 공헌하는 물품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기업은 이윤 추구에 의해 성장, 발전하고 이를 통해 고용이 증대되며 나아가 국민 경제의 발전에 기여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국가와 민족에게 공헌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신념 아래 유한양행을 제약업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건강한 국민만이 잃었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
라초이 식품회사의 성공으로 설립 이후 약 4년 만에 50여만 불에 이르는 이익금을 남긴 유일한 박사는 원료 확보를 위해 조국에 일시 귀국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보았다. 그리하여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 자기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1926년 12월 10일 제약회사인 유한양행을 설립하였다. 자본이 축척됨에 따라 1936년 유한양행은 총불입 자본금이 75만 원인 법인체 주식회사로 발족하여 유일한 박사가 제1대 취체역 사장에 취임하였다. 1936년까지 유한양행의 전 재산은 유일한 박사의 개인 재산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업이 확실한 기반 위에 서자 회사의 소유권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줄 계획을 수립하고 법인체인 주식회사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는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며 사원의 것이라는 뜻에서 주식의 일부를 사원들에게 공로주로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행된 ‘사원지주제’이다. 1962년 유한양행은 제약업계 최초로 주식을 공개하여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였다.
유일한 박사가 주식을 공개한 직접적인 목적은 자기자본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주식의 대중적인 소유는 회계의 공개와 함께 기업의 민주화를 의미한다는 차원에서 상장한 것이었다. 또한 애국정신과 직결되는 창립자의 납세관에 따라 유한양행은 ‘정직하고 조속한 납세’를 지상 시책으로 삼고 실천하여 ‘한국 유일의 자진납세업체’, ‘한국 유일의 장부공개업체’ 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 하나 특기할만한 것은 1969년 10월 30일에 개최된 제44기 정기주주총회에서 애국자이며 기업가인 유일한 박사는 그의 생애에 마지막이 되었던 사장직을 조권순 전무에게 계승시켰다. 그는 사장이 사임하면 그 아들이 사장직을 계승하는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폐단을 없애고 경영 인생을 마무리 한 것이다.